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저항제어 전동차 (문단 편집) ==== {{{#Gray 2차분 (1977.11~1978.02)}}} ==== || [[파일:39680605461_7b98eb76f5_o.jpg|width=100%]] || || 114편성 (1028호) || * 111~116편성 (총 6편성 36량) * 제작사: [[대우중공업]] * 일반석 구조: 1칸 한쪽 면 3석-7석-7석-7석-3석 전동차의 국산화 과업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후, [[대우중공업]]의 전신인 한국기계공업 주도로 73년 2월부터 국산 전동차 생산준비와 [[일본차량제조]]와의 제휴를 통한 기술 취득절차, [[1975년]]도 [[11월]], 국고 채무부담행위 예산에 의한 구매계획의 국회 통과 과정을 거쳐 국산 전동차 개발을 시작했다. [[1976년]] [[12월]] 철도청에 TC, M', M 각각 3량이 처음으로 국내 생산을 마치고 반입되었다. 한국기계공업이 [[대우중공업]]으로 사명을 바꾼 후 철도청은 본격적으로 국내 조립된 차량들이 증차분으로 납품되기 시작한 것에 따라 지하철공사 측에서도 추가 증차를 위한 6량 6개편성을 국내 생산하기로 결정, [[대우중공업]](주)와 [[1977년]] [[11월]]까지 16량(TC 6량, M'5량, M 5량)의 국산 전동차가 납품되어 시승식을 갖고, 78년 [[2월]]에 2차로 2량(M, M' 각 1량씩), [[1978년]] [[6월]]에 3차로 18량(TC 6량, M차 6량, M'차 6량)이 반입, [[1978년]]까지 6량 16개 편성을 운용한다. 비록 국산화는 실제 전장품이 거의 수입품인 단순 조립에 그치는 것이었지만 철도차량 제작사에 한 획을 그은 나름 인상깊은 일이었던 것이다. 수 차례에 걸쳐 [[1985년]]까지 [[한국철도공사]]의 초기저항 차량이 대부분 10량화 되는 와중에도 6량 편성을 고수하다가 [[1987년]] 냉방개조 후에는 10량화가 추진됐다. 이미 [[경인선]]은 수용량이 한계치에 이르러 매우 혼잡했기 때문에 6량이었던 지하철공사 소속 차량들은 [[1983년]] [[7월]]부터 상대적으로 한산했던 경부선으로만 원칙적으로 투입되었으나 10량화 후에는 제한이 풀렸다. 운행구간의 변천사는 [[수도권 전철 1호선/운행 계통#s-7]] 문서를 참조하십시오. ||<:> {{{#!folding 1977년~1978년 제작분 초저항 조성(6량) ▼ ||<-8> '''1977년~1978년 제작분 초저항 조성(6량)''' || || '''편성 / 호차''' || '''1호차[br](Tc)''' || '''2호차[br](M)''' || '''3호차[br](M')''' || '''4호차[br](M)''' || '''5호차[br](M')''' || '''6호차[br](Tc)''' || '''비고''' || || '''111편성''' || 1021 || 1121 || 1321 || 1122 || 1322 || 1022 || || || '''112편성''' || 1023 || 1123 || 1323 || 1124 || 1324 || 1024 || || || '''113편성''' || 1025 || 1125 || 1325 || 1126 || 1326 || 1026 || || || '''114편성''' || 1027 || 1127 || 1327 || 1128 || 1328 || 1028 || || || '''115편성''' || 1029 || 1129 || 1329 || 1130 || 1330 || 1030 || || || '''116편성''' || 1031 || 1131 || 1331 || 1132 || 1332 || 1032 || || }}}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